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자가 된다면, 겨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언제나 조용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급해진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다.
소리를 낮추는 대신,
상태를 묻는다.
지금 충분한지.
지금 버틸 수 있는지.
지금의 내가 안전한지.
겨울은 가난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계절이다.
여름에는 같은 티셔츠를 입어도
누가 더 여유로운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겨울은 다르다.
패딩의 두께,
니트의 질감,
집 안의 온기.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단서처럼 느껴진다.
낡은 패딩을 입을 때,
나는 단순히 추운 것이 아니다.
그 옷 안에서
시간과 선택과 미뤄둔 미래가 함께 흔들린다.
입을 때마다 털이 삐져나오는 패딩은
몸보다 먼저 마음을 춥게 만든다.
이 감정은 유난이 아니다.
기분 탓도 아니다.
뇌는 겨울을
아주 오래전부터 위험의 계절로 인식해왔다.
낮은 기온,
짧아진 낮,
줄어든 활동량.
이 환경에서 인간의 뇌는
자동으로 결핍을 탐지하는 모드로 전환된다.
그래서 겨울이 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없는 것을 세고,
부족한 것을 떠올리고,
앞날을 더 불안하게 상상한다.
이때 뇌는 묻는다.
“혹시 지금도 부족한 상태는 아닐까?”
이 질문 앞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설경도
쉽게 평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겨울에는
물질이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두꺼운 패딩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안전의 상징이 되고,
따뜻한 집은 공간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신뢰가 된다.
몽클레어 같은 가볍고 온기 있는 겨울을
사람들이 동경하는 이유도
사실은 거기에 있다.
그 옷이 비싸서가 아니라,
그 옷을 입은 사람의 뇌가
겨울 앞에서 덜 긴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다시 보게 된다.
‘부자가 되면 겨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돈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이거다.
나는 언제쯤
계절을 나의 부족함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될까.
부자가 된다는 것은
명품을 입는다는 뜻이 아니라,
겨울이 와도
뇌가 경보를 울리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춥지 않아서가 아니라,
쫓기지 않아서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
나는 가끔 상상한다.
겨울을 견디는 내가 아니라,
겨울을 통과하는 나를.
난방비를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밤,
옷의 상태를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
그때의 나는
아마 이렇게 느끼지 않을까.
겨울이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겨울이 나를 증명하지 않아서
조용해질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겨울을 미워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겨울이 드러내는
‘현재의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은
계절이 아니라 거울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선택,
지금의 속도,
지금의 위치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거울.
이 글을 쓰며 나는 안다.
지금의 나는
아직 겨울을 완전히 사랑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겨울을
나의 실패 증거로만 해석하지는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덜 가난해진 느낌이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조금 느리게,
조금 덜 급하게
그 풍경을 바라본다.
아마 이게
겨울이 나에게 허락한
아주 작은 여유일지도 모른다.